Poem(詩)/시에 젖다

김현승의 시

꽃이플 2012. 1. 24. 14:31

 

 

김현승 (1913-1975)

 

❀ 고독의 순금

 

하물며 몸에 묻은 사랑이나

짭쫄한 볼의 눈물이야

神도 없는 한 세상

믿음도 떠나

내 고독을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왔기에

흙 속에 묻힌 뒤에도 그 뒤에도

내 고독은 또한 순금처럼 썩지 않으련가

 

그러나 모르리라

흙 속에 별처럼 묻혀 있기 너무도 아득하여

영원의 머리는 꼬리를 붙잡고

영원의 꼬리는 또 그 머리를 붙잡으며

돌면서 돌면서 다시금 태어난다면

그제 내 고독은 더욱 굳은 순금이 되어

누군가의 손에서 천년이고 만년이고

은밀한 약속을 지켜주든지

그렇지도 않으면

안개 낀 밤바다의 寶石이 되어

뽀야다란 밤고동 소리를 들으며

어디론가 더욱 먼 곳을 향해 떠나가고 있을지도

 

❀ 눈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생명이고저

 

흠이 티도

나가지 않는

나의 전부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오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굽이 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창

 

창을 사랑하는 것은,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또 노래도 부를 수 잇는 시간

별들은 12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 지각(知覺) -행복의 얼굴-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여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 파 도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잇발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 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 감사

감사는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寶石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納辯의 詩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