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관한 시
상처 (나태주)
이제 내쫓으려네
내 가슴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산 하나
꿈틀대는 들판 하나
지줄대는 시냇물과
붉은 꽃 한 송이까지
나가지 않으려 하면
몽둥이로라도
내쫓으려네
산이 고함지르고
들판이 앙탈하고
시냇물이 울고
꽃은 아파 피를 흘리겠지
산을 뜯어낸 자리
들을 쫓아낸 자리
시냇물과 꽃이 지워진 자리
그 상처 만이 내 몫이네
끝내 섭섭하시다면
빈 하늘에
빈 달걀껍질 같은 달무리 하나
놓아주려네.
상처 (정호승)
비오는 날에는
빗방울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오는 날에는
눈송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눈비 그치면
햇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 (정현종)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상 처 (최하림)
말들이 떨면서
밤 불빛 속에서 속살을
드러내고 피어날수록 뽀오얀
소녀가 풀밭으로 쓰러진다
플라타너스나무 아래 수은등이 빛난다
기억들이 축축하게 달라붙는다
나는 지금, 문을 열고 근거리 공원을 보고 있다
그곳에 그리움이 있어서가 아니다 절망이
있어서도 아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밤에는
금속성 사이렌이 단속적으로 울리고 있었으며
귀가길이 늦은 시민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깊은 밤 나는 몇번이고 숲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헐떡임처럼, 헐떡임처럼, 나무들이 난폭하게 휘나부끼고
-나는 참을성 있게 보고 있었다 - 빠르고, 선명하게 나이프를 빛내면서
사나이가 시간을 죄스레 칼질하고,
생채기에서 뚝, 뚝 , 피가 흘렀다
아무도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가로등 전열이 울고 , 나는
길 위에서 아직도 푸른 그를
보고 있다 그는 오고 있다
그는 내 그림자 내 거울
나를 비추고 나를 끌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꿈과 상처 (김승희)
나대로 살고싶다
나대로 살고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이 절망이구나
눈사람의 상처 (이정록)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살집 속에 결을 만들어 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 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저 흙길을 따라가면 서걱서걱 기저귀 얼어 있던 안마당
또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를 만날 것 같다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히는 눈송이들
왱이낫이 박힌 옹이 많은 옛길을 덮는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겹겹 붕대를 두른다
삽날이 지나간 눈사람, 그 흙밥의 나이테를 어루만진다
상처 (김시천)
인생이란 그런 것
살다 보면 하나 둘쯤 작은 상처 어이 없으랴.
속으로 곯아 뜨겁게 앓아 누웠던
아픈 사랑의 기억 하나쯤 누군들 없으랴.
인생이란 그런 것.
그렇게 통속적인 일상 속에서
가끔씩 아련한 상처 꺼내어 들고
먼지를 털어 훈장처럼 가슴에 담는 것.
그 빛나는 훈장을 달고 그리하여 마침내
저마다의 그리운 하늘에 별이 될 때까지
잠시 지상에 머무는 것.
상처 (윤수천)
칼에 베이면
상처가 밖으로 남지만
사랑에 한 번 베이면
보이지 않는 상처가 가슴에 남는다.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상처를 지니고 가는 사람이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상처 (강수)
손을 베였다.
책을 잘못 건드렸다.
종이 한 장이 날을 세우고 있다가
내 영혼을 스윽 베어 버렸다.
모가지가 뜨끔했다.
종이에 묻은 핏방울이 지워지지 않았고
글자 몇 개가 붉게 물들었다
내 몸이 다녀간 흔적을 책의 영혼은 가지고 있다
내 영혼이 책을 만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책을 만났다.
그 책 속에 매복해 있던 글자들이
칼을 들고 내 눈동자를 노려보고 있을 때,
종이 한 장이, 기껏해야 종이 한 장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시인 (나태주)
제 상처를 핥으며 핥으며
살아가는 사람
한번이 아니라
연거푸 여러 번
연거푸 여러 번이 아니라
생애를 두고
제 상처를 아끼며 아끼며
죽어가는 사람, 시인.
상처 (강연호)
밑바닥 상처는 고요한 법이라고
나 어느 날 무심코 중얼거렸네 강물 위
빗방울에 흔들리는 무수한 파문처럼
사소하게 가슴 다치면서 살아왔는데
하지만 그것도 아파서 자주 엄살 떨었는데
저 파문 이는 강물의 표면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도 제 힘 다해
빗방울 튕겨내는 걸 보았네
깊은 속내까지는 덧내지 않으려
멈칫멈칫 맺혔다 풀리는 동심원을 보았네
이 사내 저 사내 다 받아주는 작부의 자궁 속에도
딱딱한 각질처럼 굳은 순정 하나는 있어
열리지 않고 끝내 고요하리라
나는 너무 쉽게 가장했나 보네
돌아보면 한 뼘도 못 되는 길을 걸어오면서
상처 아닌 상처를 들쑤셨더랬네
그 길의 상처에 빚 갚을 일 많았네
나 어느 날 강물 위 무수한 파문을 따라가다
무심코 중얼거림에 걸려 넘어졌지만
가슴 밑바닥 돌쩌귀처럼 박힌 상처는
꿈쩍도 않고 고요했네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네
상처 (오세영)
쓰라리지만
소금물로 상처를 씻는 것은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눈물이 타서 굳은
숯덩이, 소금은
슬픔을 아는 까닭에
남의 상처를 아무릴 줄 안다.
큰 파도가 작은 파도를 안아 올리듯
작은 슬픔은
큰 아픔이 위로하는 것,
그러므로 비록 쓰라리지만
우리
상처는 비누로 씻지 말고
소금물로 씻자.
비누는
쾌락의 때를 벗기는 데
써야 한다.
상처 (문병란)
팔꿈치에 난 두드러기
조그만 상처 두어 군데
만지고 만져
덧이 나 번지는 염증
만지고 만지면
결국 성한 곳도 진물이 번진다.
아픈 것은
육신이 아니라
지금 나의 나약한 마음인데
약을 바르고
침을 바르고
만지고 만지다 키우는 상처
병은 육신 속에 있는가
나약한 마음속에 있는가
과거는 영영 나을 수 없는 하나의
상처. 치료할 길 없는 병을 안고
오늘도 나는 끙끙 앓는다
못내 아쉬운 그리움을 운다.
상처 (이재무)
참, 나무가 앓고 있다
신음도 없이 표정도 없이
참나무의 허리
그의 몸,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진물이 흐르고 있다
진물이 먹여 살리던 식구들을 기억한다
가장의 진액은 그러므로 울음이 아니다
식량이다
나무도 상처가 아물 때
가려움을 느낄까
가려워서 마구 잎을 피우고
가지 흔들어댈까
상처 없이 미끈한 나무가 떨군 열매 믿을 수 없다
가려워서 어디든 몸을 문대고 비비고 싶은
생의 상처여,
낫지 말아라
몸 속의 너를 보낼 수 없다
상처는 기억이고 반성이고 부활이다
상처에 대하여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상처 입은 사람을 사랑할 때
(존 오도나휴)
깊이 상처 입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그 상처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문제삼는 일이다.
단순히 거기 상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다음엔 그것으로부터 물러나 있어라.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혼의 부드러운 빛을 그 상처에 비춰라.
- 아일랜드의 시인 -
상처 (정연복)
가슴속에 남몰래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루를 살면서도
생채기로 얼룩지는 것이
인간의 삶이거늘
아픈 상처를 감추지 말자
상처가 있어
비로소 사람인 것을
상처는 상처와 어울려
아물어 가는 것
아침고요수목원 카페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