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순금 (김현승·시인 1913-1975)
하물며 몸에 묻은 사랑이나
짭쫄한 볼의 눈물이야
神도 없는 한 세상
믿음도 떠나
내 고독을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왔기에
흙 속에 묻힌 뒤에도 그 뒤에도
내 고독은 또한 순금처럼 썩지 않으련가
그러나 모르리라
흙 속에 별처럼 묻혀 있기 너무도 아득하여
영원의 머리는 꼬리를 붙잡고
영원의 꼬리는 또 그 머리를 붙잡으며
돌면서 돌면서 다시금 태어난다면
그제 내 고독은 더욱 굳은 순금이 되어
누군가의 손에서 천년이고 만년이고
은밀한 약속을 지켜주든지
그렇지도 않으면
안개 낀 밤바다의 寶石이 되어
뽀야다란 밤고동 소리를 들으며
어디론가 더욱 먼 곳을 향해 떠나가고 있을지도
고독한 이유 (김현승·시인 1913-1975)
고독은 정직하다.
고독은 신(神)을 만들지 않고
고독은 무한의 누룩으로
부풀지 않는다.
고독은 자유다.
고독은 군중 속에 갇히지 않고
고독은 군중의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고독은 마침내 목적이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고독은 목적 밖의 목적이다.
목적 위의 목적이다.
하얀 고독 (홍해리·시인 1942-)
너는
암코양이
밤 깊어 어둠이 짙을수록
울음소리 더욱 애절한
발정 난 암코양이
동녘 훤히 터 올 때
슬슬슬 꼬리를 감추며 사라지는
밤새도록 헤매 다녀
눈 붉게 충혈된
새벽 이슬에 젖은 털을 털며
사라지는
비릿한 발걸음
유령 같은
고독 (박인혜·시인 1961-)
하나의 인간임을 알게 하는 것
타인과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더욱 자신답게 하는 것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그 빛으로 인해
또 다른 빛을
찾아 헤매는
무엇이든 닿고 싶고
닿으면
빛으로
변화시키고 싶은
하나의 불꽃
내가 뿌린 고독 (나태주·시인 1945-)
내가 뿌린 고독의 씨앗이요
내가 키운 비애의 새싹인데
그 놈들이 나보다 먼저 자라
내 앞길을 막고 섰네
내 하늘을 가리고 섰네.
고독의 미 (이생진·시인 1929-)
절해고도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면 천벌을 받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쁜 무당벌레
등에 원불교 짊어지고 온다
이것까지 미워하면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고독 앞에서는 미운 것이 없다.
고독의 순도 (김민정·시인 1959-)
네 고독
그 절정은
순도가 얼마일까
네 고독
그 빛깔은
채도가 얼마일까
네 침묵
그 뜨거운 파문
명도는 얼마일까
고독이란 (오정방 1941-)
북극에 혼자 뚝 떨어져 있어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전혀 고독하지 않을 수 있다
비록 군중 속에 있다할지라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엄청 고독하다 느낄 수 있다
고독 (홍인숙)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詩를 썼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詩를 쓴다
그러나
내 앞엔 언제나
白紙 한 장
눈물에 젖는다.
고독 (류정숙·詩人)
깨물면
오도독
뼈마디 무너지는 소리를 낸다
삼키면
양주보다 독하게
취해온다
뱉어내면
단장의 아픔
깨물 수도
삼킬 수도
뱉어낼 수도 없는
형벌이구나.
고독을 위한 의자 (이해인 1945-)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나 속의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으므로
여럿 속에 있을 땐
미처 되새기지 못했던
삶의 깊이와 무게를
고독 속에 헤아려볼 수 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
안 해야 할 일 분별하며
내밀한 양심의 소리에
더 깊이 귀기울일 수 있으므로
그래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
여럿 속의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고독 속에
나를 길들이는 시간이다.
고독 (윤고영·詩人)
왜! 있잖은가
비오는 날
창문 열어 놓으면
나무잎새에서 토닥거리는
쓸쓸함 같은 거
저녁나절에..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쯤에서
서녘노을 바라볼 때의
막막한 그리움 같은 거
왜! 있잖은가
지금껏 걸어온 길 처연했지만
한편으론 정성 들여 갈무리 잘했다는
대견함 느끼며
위로받고 싶은 거
생각해 보면
세상 한켠에 툭 떨어진
정말로 미세한 존재일 테지만
우주 속 어디쯤 그 한 부분 지탱하는
질량 가득한 정신 있었다고
자위하고 싶은 거
잔인한 고독 (황금찬·詩人 1918-)
언제부턴가 내게 와서
벗이 되었다.
입이 없다.
한번 오면 갈 줄 모르고
끝장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외출이라도 하면
책갈피 속에나
서랍 안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가
어느새 나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선다.
키는 신통히도
나와 꼭 같다.
눈을 감으면
그는 반대로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다.
새벽 다섯시 오분 전
꼭 그 시각에 잠을 깨우고
싸늘한 만년필 뚜껑에 앉아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듣고 있다.
고독 처방 (공석진·詩人)
외로움은 병입니다
불신의 탑을 쌓아
마음의 벽을 구축하여
우울 속으로 자신을 익사시키는
지독한 그리움의 난치병입니다
믿음은 약입니다
갓난아이의 호기심으로
세상 속에 자신을 내어놓아
살가운 시선으로 의지하는
관심이라는 약입니다
사랑은 백신입니다
무지無知한 잣대로 휘두른 상처에
자신을 비워낸 깊이 만큼 어루만져
고독이란 이름의 몹쓸 병으로부터
평생 면역을 제공하는 백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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