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시
희망
우선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만나서 즐겁게 할 이야기가 있는 것
아직도 보고 싶은 풍경이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고 읽고 싶은 책이 있는 것
무엇보다도 오늘 숨 쉬는 사람이고 내일 아침에도 잠에서 깨어 햇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란 것
이보다 좋은 것이 어디 더 있을까?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유리창
이제 떠나갈 것은 떠나게 하고 남을 것은 남게 하자
혼자서 맞이하는 저녁과 혼자서 바라보는 저 들판을 두려워 하지 말자
아, 할수만 있다면 잎새 떨어진 겨울나무 빈 가지에 까마귀라도 한마리 불러 가슴 속에 기르자
이제 지나간 날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해 안달하지도 말고 다가올 날의 해 짧음을 아쉬워 하지도 말자.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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