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詩)/시에 젖다

나태주의 시

꽃이플 2011. 12. 16. 13:33

 

 

나태주의 시

 

희망

 

우선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만나서 즐겁게 할 이야기가 있는 것

 

아직도 보고 싶은 풍경이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고

읽고 싶은 책이 있는 것

 

무엇보다도 오늘 숨 쉬는 사람이고

내일 아침에도 잠에서 깨어

햇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란 것

 

이보다 좋은 것이 어디

더 있을까?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유리창

 

 

이제 떠나갈 것은

떠나게 하고

남을 것은 남게 하자

 

혼자서 맞이하는 저녁과

혼자서 바라보는 저 들판을

두려워 하지 말자

 

아, 할수만 있다면

잎새 떨어진 겨울나무 빈 가지에

까마귀라도 한마리 불러

가슴 속에 기르자

 

이제

지나간 날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해 안달하지도 말고

다가올 날의 해 짧음을 아쉬워 하지도 말자.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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