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 1926)
고독
고독은 비와 같다. 고독은 바다에서 저녁을 향해 오른다. 고독은 아득히 외딴 평원에서 언제나 고독을 품고 있는 하늘로 향한다. 그러나 비로소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동틀 녘에 고독은 비가 되어 내린다. 모든 골목들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 것도 찾지 못한 몸뚱어리들이 실망과 슬픔에 서로를 놓아줄 때,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침대에서 자야 할 때,
고독은 강물과 함께 흐른다.
엄숙한 시간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에서 이유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밤에 이유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걷고 있다. 정처도 없이 걷고 있는 사람은 내게로 오고 있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에서 이유 없이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언제였던가 너를 마난 적이 있다. 지금 이 가을날 우리는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내손을 잡고 흐느끼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 때문에 우는가? 핏빛 붉은 나무 때문인가? 언제였던가 한번은 네가 행복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소망
새벽 하늘의 긴 강물처럼 종소리가 흐르면 오랜 기도로 스스로를 잊는 그런 여인으로 살게하여 주십시오. 한번의 손짓, 한번의 눈짓에도 한번의 몸짓에도 후회와 부끄럼없는 그런 여인으로 살게하여 주십시오.
기쁠땐 꽃처럼 활짝 웃을 줄 알며 슬플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 줄 아는 그런 여인으로 살게하여 주십시오.
주어진 길에 순종할 줄 알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할 줄 아는 그런 여인으로 살게 하여 주십시오.
가을날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살이 찌도록 마련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날을 베풀어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돋구어 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집을 짓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외롭게 그러합니다. 잠이 깨어,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나뭇잎이 떨어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사이를 이리 저리 헤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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