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 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겁니다.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먼먼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숲으로 가는 길 이시하
숲이 내게로 오지 않아 내가 숲으로 갑니다
새 한 마리 길 열어 주니 두렵지는 않습니다 때로 바람이 음흉하게 휘돌아 몰아치고 마른 까마귀 카악카악 울며 죄를 물어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가야할 때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람도 잔잔하여지고 까마귀 울음소리도 잦아 들면 멀리 앞서가던 길잡이 새 나를 기다립니다 길은 밝아지고 푸른 것들이 환호하며 손뼉치는 소리 시냇물소리, 들꽃들 웃음소리, 나비의 날갯짓소리 푸른 숨소리, 소리들, 무지개로 떠 흐르는 저기 먼 숲이 나를 부릅니다
때로 두려웁지만 숲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너에게 가는 길 윤성택
노을이 약봉지처럼 터지고 있었다 몸살을 앓아내는 것인지 갈대들은 야윈 채로 서성거렸다 사는 게 늘 초행길이어서 능선이 선명할수록 그 아래는 덧칠할 수 없는 생의 여백이었다 저녁 해가 안간힘으로 길을 끌어다 잇대어도 부재중인 것들, 하늘 어딘가 별빛처럼 문자메시지가 떴을까 가야할 길을 아는 저녁놀을 볼 때마다 단한번 선택으로 엇갈렸던 길들이 궁금해졌다 기어이 이 길을 걸어 너에게 가자고 한번 믿어보자고 걷는 한때. 산이 지나온 아픈 길을 당기며 천천히 돌아눕고 있었다
나에게 길이 있었다 박상순
그 길에 서 있는 모자 쓴 사람 가방을 든 사람, 눈이 큰 사람, 키가 큰 사람, 멜빵을 멘 사람 그 사람들이 뭉쳐서 하나가 된 사람
뭉쳐진 사람들 사이에서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다시 가방을 든 사람, 눈이 큰 사람, 키가 큰 사람 새로 산 구두를 쭈그려 신은 사람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길 위에 또 보이는 사람 새로 나온 사람, 새로 뭉쳐진 사람, 다시 또 부스러기처럼 떨어진 사람 그 길에 서 있는 모자 쓴 사람
길이 끝난 곳에서 그가 지나온 길을 색종이처럼 동그랗게 말아놓고 사라지던 사람 멜빵을 멘 사람
빈 상자를 닮은 사람, 눈이 큰 사람을 닮은 사람, 키가 큰 사람을 닮은 사람, 사람을 멘 사람,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던 사람
삶에게 길을 묻다 천양희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부다페스트 가는 길 김연숙
지금은 그냥 그렇게 지나는 시간 기다리며 지나는 시간 국경을 넘고서도 아득하게 빈 들판만 이어지네 진주를 품은 조개의 외곽은 멀고도 길어
이젠 돌아보아도 될 것 같아 부다페스트 불씨 하나 묻어두고 돌아보며 떠난 길 젖은 얼굴 감싸 쥐고 황망히 떠났었네 어디라도 좋았네 부다페스트 아니라면 멀리 멀리 벗어날수록 스스로 휘황해지는 네 광채 나를 감싸고 눈을 가린 익명의 그리움 하나 줄곧 뒤따르고 있었네
물결 위로 네 머리카락 띄워 보내던 세체니 다리 위의 여름날을 기억하니 머리칼 한 올 넣어 접은 종이조각엔 신탁(神託)이란 두 글자도 써넣었었다 물결 위에 너를 맡기고 돌아섰어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네가 보인다 부다페스트 심장을 가르는 느린 강도 아직 흐르고 노을 빛 너의 광채 향기를 뿜네 유적지로 남은 나의 사랑, 나의 상심(傷心)은 진주가 되고 오늘도 이어지는 불꽃축제 낙서 휘갈긴 옛 성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울고 있구나 동행하던 익명의 그리움 하나 먼저 와서 기다렸구나 휘황한 네 광채 뿌연 저 곳 가느다란 소망 한 줄기 요새 위에서 별빛처럼 하늘에 닿고 있구나
부다페스트 먼 거리 밖에서만 나는 너를 보네 너를 안 것은 처음부터였는데
새는 자기 길을 안다 김종해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먼저 안다 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 길을 또한 지운다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김정희
대낮에 꽃 양산이 즐비한 거리를 늙은 고양이처럼 걸었다 바람이 불었다 내 좁은 흉곽으로 經들이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흘러도 읽어내지 못하는 까막눈을 새들이 꺼내 물고 네거리 쪽으로 갔다 길고 긴 詩句를 받아 적는지 한 떠돌이가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디에도 우리가 지나 온 길보다 더 긴 시구를 가진 시는 없다* 나는 꽃 핀 길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유랑하는 청춘들의 푸른 이마를 적시며 행상꾼의 생선 비린내를 몰며 삼라만상 狂氣들을 덮으며 흘러가는 經들 위로 다시 발을 얹었다 네게로 가기 위해
길 위에서의 명상 홍일표
남산 한옥마을에서 인사동까지 걷는다 지하철도 버스도 다 버리고 걷는다. 내 발바닥과 길이 직접 내통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뜨겁게 만난다 타박타박, 기웃기웃 걷다보면 충무로를 지나 명보극장, 을지로에 이른다 을지로 3가에서 잠시 멈칫거리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이 꺾일 때 잠시 생각도 꺾어진다 일방통행으로 치닫는 생각이 자주 꺾여야 길눈이 밝아진다 아직도 어둡기만 한 生의 길눈, 두리번거리며 종로 3가역, 지하도를 거쳐 1번 출구로 나온다 탑골공원 방향으로 나와 길가 노점상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깜박 길을 놓친다 길이 나를 잊는 것인지 내가 길을 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외줄기 생각만 따라가다가 어느새 내 생의 절반이 지났다 탑골공원 앞에서 철컥, 다시 길이 발바닥에 붙는다 흩어지는 사념의 끝머리에 소주병과 함께 쓰러져 있는 노숙자 행인들의 시선 대신 한 마리 파리가 그를 열심히 어루만지며 핥는다 노숙자는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웃는다 어릴 적 고향 마을 어머니를 만나는가 보다 뒤란 장독대 옆에서 다사로운 봄볕에 취해 있는가 보다 낙원상가, 허리우드 극장을 눈앞에서 지우고 마지막 횡단보도를 건너 인사동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낯선 거리를 가로질러 다다른 504호 철 지난 가을이 아직도 심각한 표정으로 남아있는 곳, 돌아보면 한 생을 다 산 것 같다 잠시 길 밖으로 나와 신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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