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詩)/시에 젖다

'길'을 노래한 시

꽃이플 2012. 2. 7. 15:51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 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겁니다.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먼먼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숲으로 가는 길

                                     이시하

 

숲이 내게로 오지 않아 내가 숲으로 갑니다

 

새 한 마리 길 열어 주니 두렵지는 않습니다

때로 바람이 음흉하게 휘돌아 몰아치고

마른 까마귀 카악카악 울며 죄를 물어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가야할 때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람도 잔잔하여지고

까마귀 울음소리도 잦아 들면

멀리 앞서가던 길잡이 새 나를 기다립니다

길은 밝아지고 푸른 것들이 환호하며 손뼉치는 소리

시냇물소리, 들꽃들 웃음소리, 나비의 날갯짓소리

푸른 숨소리, 소리들, 무지개로 떠 흐르는

저기 먼 숲이 나를 부릅니다

 

때로 두려웁지만

숲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너에게 가는 길

                                 윤성택

 

노을이 약봉지처럼 터지고 있었다

몸살을 앓아내는 것인지

갈대들은 야윈 채로 서성거렸다

사는 게 늘 초행길이어서

능선이 선명할수록 그 아래는

덧칠할 수 없는 생의 여백이었다

저녁 해가 안간힘으로 길을 끌어다

잇대어도 부재중인 것들,

하늘 어딘가 별빛처럼 문자메시지가 떴을까

가야할 길을 아는 저녁놀을 볼 때마다

단한번 선택으로 엇갈렸던

길들이 궁금해졌다 기어이

이 길을 걸어 너에게 가자고

한번 믿어보자고 걷는 한때.

산이 지나온 아픈 길을 당기며

천천히 돌아눕고 있었다

 

 

나에게 길이 있었다

                                      박상순

 

그 길에 서 있는 모자 쓴 사람

가방을 든 사람, 눈이 큰 사람, 키가 큰 사람, 멜빵을 멘 사람

그 사람들이 뭉쳐서 하나가 된 사람

 

뭉쳐진 사람들 사이에서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다시 가방을 든 사람, 눈이 큰 사람, 키가 큰 사람

새로 산 구두를 쭈그려 신은 사람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길 위에

또 보이는 사람

새로 나온 사람, 새로 뭉쳐진 사람, 다시 또 부스러기처럼 떨어진 사람

그 길에 서 있는 모자 쓴 사람

 

길이 끝난 곳에서

그가 지나온 길을 색종이처럼 동그랗게 말아놓고 사라지던 사람

멜빵을 멘 사람

 

빈 상자를 닮은 사람, 눈이 큰 사람을 닮은 사람, 키가 큰 사람을 닮은 사람,

사람을 멘 사람,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던 사람

 

 

삶에게 길을 묻다

                                     천양희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부다페스트 가는 길

                                      김연숙

 

지금은 그냥 그렇게 지나는 시간

기다리며 지나는 시간

국경을 넘고서도 아득하게

빈 들판만 이어지네

진주를 품은 조개의 외곽은 멀고도 길어

 

이젠 돌아보아도 될 것 같아 부다페스트

불씨 하나 묻어두고 돌아보며 떠난 길

젖은 얼굴 감싸 쥐고 황망히 떠났었네

어디라도 좋았네 부다페스트 아니라면

멀리 멀리 벗어날수록

스스로 휘황해지는 네 광채 나를 감싸고

눈을 가린 익명의 그리움 하나

줄곧 뒤따르고 있었네

 

물결 위로 네 머리카락 띄워 보내던

세체니 다리 위의 여름날을 기억하니

머리칼 한 올 넣어 접은 종이조각엔

신탁(神託)이란 두 글자도 써넣었었다

물결 위에 너를 맡기고 돌아섰어도

잊은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네가 보인다 부다페스트

심장을 가르는 느린 강도 아직 흐르고

노을 빛 너의 광채 향기를 뿜네

유적지로 남은 나의 사랑,

나의 상심(傷心)은 진주가 되고

오늘도 이어지는 불꽃축제

낙서 휘갈긴 옛 성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울고 있구나

동행하던 익명의 그리움 하나

먼저 와서 기다렸구나

휘황한 네 광채 뿌연 저 곳

가느다란 소망 한 줄기 요새 위에서

별빛처럼 하늘에 닿고 있구나

 

부다페스트

먼 거리 밖에서만 나는 너를 보네

너를 안 것은

처음부터였는데

 

 

새는 자기 길을 안다

                                        김종해

 

하늘에 길이 있다는 것을

새들이 먼저 안다

하늘에 길을 내며 날던 새는

길을 또한 지운다

새들이 하늘 높이 길을 내지 않는 것은

그 위에 별들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벚꽃 핀 길을 너에게 주마

                                                 김정희

 

대낮에

꽃 양산이 즐비한 거리를 늙은 고양이처럼 걸었다

바람이 불었다

내 좁은 흉곽으로 經들이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흘러도 읽어내지 못하는 까막눈을

새들이 꺼내 물고 네거리 쪽으로 갔다

길고 긴 詩句를 받아 적는지

한 떠돌이가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디에도

우리가 지나 온 길보다 더 긴 시구를 가진 시는 없다*

나는 꽃 핀 길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유랑하는 청춘들의 푸른 이마를 적시며

행상꾼의 생선 비린내를 몰며

삼라만상 狂氣들을 덮으며 흘러가는 經들 위로

다시 발을 얹었다

네게로 가기 위해

 

길 위에서의 명상

                                         홍일표

 

남산 한옥마을에서 인사동까지 걷는다

지하철도 버스도 다 버리고

걷는다. 내 발바닥과 길이 직접 내통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뜨겁게 만난다

타박타박, 기웃기웃 걷다보면

충무로를 지나 명보극장, 을지로에 이른다

을지로 3가에서 잠시 멈칫거리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이 꺾일 때 잠시 생각도 꺾어진다

일방통행으로 치닫는 생각이 자주 꺾여야

길눈이 밝아진다

아직도 어둡기만 한

生의 길눈,

두리번거리며 종로 3가역, 지하도를 거쳐 1번 출구로 나온다

탑골공원 방향으로 나와

길가 노점상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깜박 길을 놓친다

길이 나를 잊는 것인지

내가 길을 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외줄기 생각만 따라가다가

어느새 내 생의 절반이 지났다

탑골공원 앞에서 철컥, 다시 길이 발바닥에 붙는다

흩어지는 사념의 끝머리에

소주병과 함께 쓰러져 있는 노숙자

행인들의 시선 대신

한 마리 파리가 그를 열심히 어루만지며 핥는다

노숙자는 눈을 감은 채 희미하게 웃는다

어릴 적 고향 마을 어머니를 만나는가 보다

뒤란 장독대 옆에서 다사로운 봄볕에 취해 있는가 보다

낙원상가, 허리우드 극장을 눈앞에서 지우고

마지막 횡단보도를 건너

인사동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낯선 거리를 가로질러 다다른 504호

철 지난 가을이 아직도 심각한 표정으로 남아있는 곳,

돌아보면 한 생을 다 산 것 같다

잠시 길 밖으로 나와 신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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