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詩)/시에 젖다

박재삼의 시

꽃이플 2012. 4. 12. 14:47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강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겠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가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강을 처음 보것네.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

 

꽃이나 잎은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도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은 지고 만다.

 

그런데도 그 멸망을 알면서

연방 피어서는

야단으로 아우성을 지른다.

 

다시 보면 한정이 있기에

더 안쓰럽고

더 가녀린 것인데, 그러나

위태롭게, 아프게, 이 세상에

끝없이 충만해 있는 놀라움이여.

 

아, 사람도 그 영광이

물거품 같은 것인데도 잠시

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 빛날 뿐이다.

 

 

❁ 한(恨)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 공일

한낮에 무심코 보니

길가에 예닐곱 살짜리

아이들 네댓이 놀고 있다.

땅다먹기를 하는

그들의 눈은 전심전력

한 치라도 자기 땅을 만들기에 바빠

곁눈을 팔지 않고 있다.

그런 것이, 비행기가 날아도

군인들이 중무장으로 행군하고 있어도

그들에게는 아랑곳이 없다.

하느님은 홀로 알까,

어른들이 하는 일도

손에 흙묻힌 아이들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 겨울 나그네

 

마흔 다섯으로 접어드니

세월은 '할수없다, 할수없다' 하면서

내 이마에 잔주름을 잡고

허리 밑에 찬바람을 일으키고

머리 위에는 눈발을 날려

영락없는 겨울 나그네의 이 쓸쓸함이여.

 

솔잎에 송충이던가,

오장 육부도 갉다가

살갗도 갉다가

아침 밥숟갈 드는 손의 힘도 앗아가고

무엇도 앗아 가고 무엇도 앗아 가더니

 

마지막 눈 정신 쪽에는 그래도

남겨 줄 것을 남겨 주었더라는 듯,

 

막내아이 치는 팽이가

한창 신을 내고 돌아가는 판에

햇빛이 장난치듯 감겨들고 있는 것을,

오, 아이의손에세월이잠깐묶이고있는것을,

눈물겨운 광경으로 환히 환히 내려다보노라.

 

❁ 기다리는 것

 

어제는 장에 나가

모처럼 옛 벗을 만나

반갑게 술잔을 나누고,

오늘도 그저 어정어정

집을 나서면

다시 누구든 반가운 이를 맞으리라.

 

그런 비슷한 하루이지만

한껏 아름답고

사람에게는 情이 있어

얼마나 돋보이는가.

 

❁ 靑山을 보며

 

사람 사는 세상은

나날이 어지러워가고,

거기다 나이 들수록

하루하루 기억력이 떨어지고,

가령 서너 달 전에

처음 인사를 나눈 사람도

다시 만나면

어떤 경우엔 성도 이름도 잊고

그저 겉으로만 아는 체할 따름이네.

 

그러나 뒤에 서 있는

아득한 靑山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인 것 같아

결국 거기에 가서

묻힐 일만 뚜렷이 남았네.

 

❁ 갈대밭에서

 

갈대밭에 오면

늘 인생의 변두리에 섰다는

느낌밖에는 없어라.

 

하늘 복판을 여전히

구름이 흐르고 새가 날지만

쓸쓸한 것은 밀리어

이 근처에만 치우쳐 있구나.

 

사랑이여

나는 왜 그 간단한 고백 하나

제대로 못하고

그대가 없는 지금에사

울먹이면서, 아, 흐느끼면서

누구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할 소리로

몸째 징소리 같은 것을 뱉나니.

 

❁ 비가(悲歌)

 

잔잔한 노래만을 외우면서

결국에는 별까지 가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더냐.

 

서럽지만 하는 수 없이

땅에 묻히고

밝은 데는 어림도 없고

캄캄한 데로만 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예비되어 있을 따름인데,

아, 온갖 발버둥치는 것을 섞어도

이 엄정한 사실에서

한치도 벗어날 장사가 없네.

 

그러니 오늘

환한 꽃이 물에 어리는

천하에 제일 가는 경치를

원대로는 보고 간다마는

어쩔거나,

그것도

눈물을 배경으로

누리는 것이 그 전부라네.

 

❁ 쓸쓸한 나날

 

나이 쉰을 몇 해 넘기니까

실수 많은 삶을 살더라도

아프게 충고하는 이가 없어

세상은 속속들이 외로워가고

설령 게을러

논밭을 잘못 갈더라도

하늘은 그저 멍청히

내려다보기만 하는 이 쓸쓸한 나날!

 

잘하는 일은 눈에 뜨이지 않고

어쩐지 허물만 드러나고

결국은 하염없이 세월이 흘러

이제 몇 번 휘영청

저 가을 하늘을 맞으면 끝장인가?

 

❁ 미루나무를 보며

 

아무리 박사가 되더라도

또 아닌 말로 재벌이 되더라도

그가 처한 한 세상뿐

결국 땅 밑에 묻히고 마는

허망한 종말을 맞아야 하고

그로써 끝장인데,

저 미루나무에

연초록 잎사귀들이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피어

바람에 살랑살랑

온몸을 내맡겨 흔들고 있고

반짝반짝 생명의 분수를

환희 하나로 연주하고 있는

이 첫여름 입구의

무상(無上)의 눈물겨운

은혜를 보아라.

이 기쁨을 시방 눈앞에 보면

예쁜 손가락을 편 어린이처럼

세상은 살맛이 나는 곳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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