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詩)/시에 젖다

이정하의 시

꽃이플 2012. 4. 19. 16:29

 

 

이정하 시 모음

 

기대어 울 수 있는 한가슴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겐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겐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더욱 필요한 것임을.

그대 만나고서부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여 지금 어디 있는가.

보고싶다. 보고싶다.

말도 못할 만큼

그대가 그립습니다.

 

길의 노래

 

절망의 꽃잎 돋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겨드랑이에서

무릎에서

어디서 눈이 하나씩 열리는가

 

돋아나는 잎들

숨가쁘게 완성되는 꽃

그러나 완성하는 절망이란 없다

 

그만 지고 싶다는 생각

늙고 싶다는 생각

삶이 내 손을 그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세상의 수많은 사람중의 한 사람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었거든 사랑했다 말하지 말고

떠날 일입니다.떠난 다음에는 고개를 돌리지 말고

쓸쓸히 걷는 모습 또한 보여 주지도 말 일입니다.

서로 가는 길이 틀릴지라도 이 땅 위에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나는 그대에게 상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그대의 삶에 힘겨운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 진정 나를 떠났거든 내가 있었다는 기억마저

잊어버릴 일입니다.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우리, 인연이 끊기지 않아 어쩌다 길 모퉁이에

서 마주치면 세상의 수 많은 사람중의 한 삶이

거니 가볍게 생각할 일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의

앞날을 기꺼이 축복할 수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될 일입니다.이별했다고 해서 서로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남아 있지 말 일입니다.

 

 

씻은 듯이 아물 날

 

살다 보면 때로

잊을 날도 있겠지요.

잊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무덤덤해질 날은 있겠지요.

 

그 때까지 난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간직하기 위해서

 

살다 보면 더러

살 만한 날도 있겠지요

상처받은 이 가슴쯤이야

씻은 듯이 아물 날도 있겠지요.

 

그 때까지 난

함께 했던 순간들을 샅샅이 끄집어내어

내 가슴의 멍자욱들을 키워나갈 것입니다.

그대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대를 원망해서도 아니라

그대에 대해 영영

무감각해지기 위해서.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걸어야 내 그리움의 끝에 닿을 것인지.

걸어서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밤 새도록이라도 걷겠지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버리고 나는 마냥 걷기만 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도 그냥 건성으로 지나치고

마치 먼 나라에 간 이방인처럼 고개 떨구고

정처없이 밤길을 걷기만 했습니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지만

짧은 이별일지라도 나는 못내 서럽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큰하나,

이미 버스는 끊기고 돌아갈 길 멉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걸어서 그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대의 마음으로 갈 수 있는 토큰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부르튼 발은 상관도 안 할 겁니다.

 

문득 눈물처럼 떨어지는 빗방울,

그때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아아 난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 온 몸이 폭삭 젖은 걸로 보아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랑의 이율배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삶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밤새 1

밤새 소리가 납니다. 내 혼곤한 잠 속으로 밀려와 자꾸만 울어예입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그대와 만나고 온 날이면 내 꿈 속에는 꼭 밤새가 나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요. 떠나야 하나 떠날 곳 없는 밤새. 저 무성한 어둠을 뚫고

오늘은 또 어디서 네 피곤한 날개짓을 쉬게 할 것인지. 가세요, 슬픈 그대.

내가 당신에게 짐이 되었다면 훌훌 떨쳐 버리고 멀리 날아가세요.

사랑이 없는 곳, 아픔이 없는 곳으로.

 

밤새 2

 

누구나 조금씩은 눈물을 감추며 살지.슬픔은 우리 방황하는 사랑의 한 형태인 것을.

진정 잊어야 할 아픔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더러는 가슴에 황혼을 묻어야 할 때도 있느니.

그리하여 힘겨운 날개짓에도 별빛으로 내리는 소망 같은 것 하나쯤은 남겨둘 줄도 알아야

하느니, 밤에 우는 새여 날아라. 더 가혹한 슬픔이 네 앞에 높인다 할지라도 그 슬픔을

앞서 날아라. 이별보다 먼저 날아가라. 결코 눈물 떨구지 말고, 훨훨훨...... .

 

 

거짓웃음

 

당신은 아는가?

당신의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함이

내게는 더 큰 고통인 것을.

당신은 나에게 위안을 주려

거짓 웃음을 짓지만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나는

더욱 안타깝다는 것을.

 

그대여, 언제나 그대 곁에는

아픔보다 더 큰 섬으로 내가 저물고 있다.

 

 

참회

 

때로는

서럽게 울어보고 싶은 때가 있네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넋두리도 없이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하여 정갈하게 울고 싶네

그리하여 눈물에 흠씬 젖은 눈과

겸허한 가슴을 갖고 싶네

 

그럴 때의 내 눈물은

나를 열어가는 정직한 자백과 뉘우침이 될 것이다.

가난하지만 새롭게 출발할 것을 다짐하는

내 기도의 첫 구절이 될 것이다.

 

촛 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한 자루의 촛불을 켜고 마주 앉아보라.

고요하게 일렁이는 불빛 너머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더욱더 아름다워 보일 것이고

또한, 사랑은 멀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깝고 낮은 곳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웁거든

한 자루의 촛불을 켜두고 조용히 눈을 감아보라.

제 한 몸 불태워 온 어둠 밝히는 촛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두 손 모으다 보면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은 어느새,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당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밖을 향하여

 

동굴을 지나온 사람이라야 동굴을 안다.

그 습하고 어두운 동굴의 공포

때로 박쥐가 얼굴을 할퀴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벌레가 몸에 달라붙어

뗄레도 떨어지지 않게 꽉 달라붙어

살점을 뜯고 피를 빨아먹는 으으 이 끔찍함!

발을 헛디뎌 수렁에도 빠졌다가

깨진 무릎 빠진 손톱으로 기어서 기어서라도

동굴을 지나온 사람이라야 동굴을 안다.

동굴 밖 햇빛의 눈부심을 안다.

 

 

수평선 지우기

 

물새떼 수평선 따라 날아갑니다. 그 중에 한 마리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그런데 떨어지는 것은 새가 아니라 끼룩끼룩 그들의 울음입니다. 해류가

마주치는 곳에서 한 사나이가 그물을 치고 있습니다. 파도에 휩쓸려 떠다니는 물새울음을

건집니다. 먼 날 잃어 버린 자기의 꿈을 건져냅니다. 연한 부리가 저녁 햇빛 받아

빛 날 때, 비로소 물새는 발톱으로 수평선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워지는

것은 수평선이 아니라 물결치는 물결치는 그 바다입니다.

 

 

사랑했던 날보다

 

그대는 아는가,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대와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그로 인한 아픔은 내 인생 전체를 덮었다.

바람은 잠깐 잎새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 때문에 잎새는 내내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가 그대. 이별을 두려워했더라면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이별을 예감했기에 더욱 그에게

열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처입지 않으면 아물 수 없듯

아파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네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여 진정 아는가.

 

진실로

 

그에게서 사랑할 만한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줄수록 샘솟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

누군가를 가장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게 순조롭고 편하게 느껴질 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못 믿을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때,

그 사람이 하던 일에 실패해

실의에 빠져

절망의 구렁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런 때야말로 사랑이 진정 필요한 것입니다.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겪었던 슬픔과 고통,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이 멀었다

 

어느 순간,

햇빛이 강렬히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럴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잠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도 그렇게 왔다.

그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줄

까맣게 몰랐다.

 

 

 

바람 속을 걷는 법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림을 아십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집 밖을 나섰습니다.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걷기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서 걷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싫었던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잊었다 생각했다가도 밤이면 속절없이 돋아나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천 근의 무게로 압박해오는

그대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당신을

가두고 풀어주는 내 마음감옥을 아시는지요

잠시 스쳐간 그대로 인해 나는 얼마나 더

흔들려야 하는지. 추억이라 이름 붙인 것들은

그것이 다시는 올 수 없는 까닭이겠지만

밤길을 걸으며 나는 일부러 그것들을

차례차례 재현해봅니다. 그렇듯 삶이란 것은,

내가 그리워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하나 맞이했다가 떠나보내는 세월 같은 것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만 남아

떠난 사람의 마지막 눈빛을 언제까지나 떠올리다

쓸쓸히 돌아서는 발자국 같은 것.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림을 아십니까

 

 

이쯤에서 다시 만나게 하소서

 

그대에게 가는 길이 멀고 멀어

늘 내 발은 부르터 있기 일쑤였네.

한시라도 내 눈과 귀가

그대 향해 열려 있지 않은 적 없었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사람.

생각지 않으려 애쓰면 더욱 생각나는 사람.

그 흔한 약속 하나없이 우린 헤어졌지만

여전히 내 가슴에 남아 슬픔으로 저무는 사람.

내가 그대를 보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나의 사랑이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찬이슬에 젖은 잎새가 더욱 붉듯

우리 사랑도 그처럼 오랜 고난 후에

마알갛게 우러나오는 고운 빛깔이려니.......

함께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으니

이쯤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하소서.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

 

햇살이 맑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비가 내려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전철을 타고 사람들 속에 섞여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대가 생각났습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외려

그런때일수록 그대가 더 생각나더군요.

 

그렇습니다.

숱한 날들이 지났습니다만,

그대를 잊을 수 있다 생각한 날은

하루도 없었습니다.

더 많은 날들이 지나간대도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날 또한 없을 겁니다.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지만

숱하고 숱한 날 속에서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대였기에

감히 내 평생 그대를 잊지 못하리라

잊지 못하리라 추측합니다.

 

당신이 내게 남겨준 모든 것들

하다못해 그대가 내쉬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것은 이런 뜻은 아닐런지요.

언젠가 언뜻 지나는 길에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스치는 바람편에라도 그대를 마주할 수 있다면

당신께 모조리 쏟아부어 놓고…

평펑 울음이라도…

그리하여 담담히 뒤돌아서기 위해섭니다.

 

아시나요 지금 내 앞에는

그것들을 돌려 줄 대상이 없다는 것

당신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 남기없이

들려 주어야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엔

장미꽃이 유난히 붉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또 생각났습니다.

 

 

우울한 하루

 

낙엽이 떨어졌어요

내 마음 깊은 곳으로

그대를 만난 지 하루만 지나도

내 마음은 우울병을 앓는답니다.

어떤 독한 약을 먹어도 고쳐지지 안는

 

기다리지 않기로 해놓고

혼자 있을 땐 혼자의 생활에 충실하기로 해놓고

난 또 멍청히 전화기만 내려다봅니다.

지금쯤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내 마음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네요.

슬픈 나뭇잎만 가득 쌓인답니다

 

 

사랑할 수 없음은

 

사랑할 수 없음은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받지 못함은

견딜 만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음은

너무 아파 느낄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5

 

나는 늘 혼자서 떠났다.

누군들 혼자가 아니랴만

내가 막상 필요로 할 때 그대는 없었다.

그랬다, 삶이라는 건

조금씩 조금씩 외로움에 친숙해진다는 것.

그랬다, 사랑이라는 건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지는 것.

 

늦은 밤, 완행열차 차창 밖으로 별빛이 흐를 때

나는 까닭 없이 한숨을 쉬었다.

종착역 낯선 객지의 허름한 여인숙 문을 기웃거리며

난 또 혼자라는 사실에 절망했고,

그렇게 절망하다가 비 오는 거리 한 구석에서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당신을 떠올려 보았다.

 

 

한 사람을 사랑했네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길보다

자꾸만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네..

함께 한 시간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내 인생 전체를 삼키고도 남게 했던 사람.

만났던 날보다 더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사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함께 죽어도 좋다 생각한 사람,

세상의 환희와 종말을 동시에

예감케 했던 한 사람을 사랑했네.....

부르면 슬픔으로 다가올 이름,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가 가장 큰 아픔으로 저무는 사람,

가까이 다가 설 수 없었기에 붙잡지도 못했고,

이미 끝났다 생각하면서도 길을 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은 사람.....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사랑했네.....

떠난 이후에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이름,

다 지웠다 하면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눈빛,

내 죽기 전에는 결코 잊지 못할 한 사람을 사랑했네......

그 흔한 약속도 없이 헤어졌지만,

아직도 내 안에 남아 뜨거운 노래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

이 땅 위에 함께 숨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 사람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했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사람 당신을 사랑했네............

 

 

사랑한다 해도

 

사랑한다 해도 그대는 고개를 돌립니다.

벼르고 별렀던 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그대는 웬일인지 눈물만 글썽입니다.

 

다른 말은 하나도 못 하겠습니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준비해 둔 숱한 말들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말만 부지런히 되뇌었는데

그대는 웬일인지 찻잔만 매만집니다.

 

이제 나는 알았습니다.

내가 싸워야 할 상대는 그대가 아니라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임을

내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는 그대의 현실,

그것과 나는 이제 한 판 싸움을 벌일 것입니다.

누가 나가떨어지든 간에 한 판 거창하게

싸움을 벌여볼 것입니다.벌여볼 것입니다.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 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한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비오는 날의 일기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

난 창문을 열고 하루종일 밖을 내다보았다.

비오는 이런 날이면 내 마음은

어느 후미진 다방의 후미진 낡은 구석 의자를 닮네

비로소 그대를 떠나 나를 사랑할 수 있네

안녕, 그대여.

난 지금 그대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

당신을 만난 날이 비오는 날이었고

당신과 헤어진 날도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이었으니

안녕, 그대여

비오는 이런 날이면 그 축축한 냄새로 내 기억은

한없이 흐려진다.

그럴수록 난 그대가 그리웁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안녕, 그대여

비만 오면 왠지 그대가 꼭 나를 불러줄 것 같다.

 

너의 모습

 

산이 가까워질수록

산을 모르겠다.

네가 가까워질수록

너를 모르겠다.

 

멀리 있어야 산의 모습이 또렷하고

떠나고 나서야 네 모습이 또렷하니

어쩌란 말이냐, 이미 지나쳐 온 길인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인데.

 

벗은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끌고 온 줄이야.

산그늘이 깊듯

네가 남긴 그늘도 깊네.

 

 

무소유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마라

그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에 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을 했네

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 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사랑은 그처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다.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우리는 상처를 입는다.

나무들을 보라

그들도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지 않은가

함께 서 있으나 너무 가깝게 서 있지 않는 것.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그늘을 입히지 않는 것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 오래간다.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조용히 손 내밀었을 때..

 

내 마음속에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은

내가 가장 외로울 때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손을 잡는다는 것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일인 동시에.

서로의 가슴속 온기를

나눠가지는 일이기도 한 것이지요..

 

사람이란

개개인이 따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지만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손을 잡아주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하나가 되기 시작합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었을 때,

그때 이미 우리는 가슴을 터놓은 사이가 된 것입니다

 

 

 

'Poem(詩) > 시에 젖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들레  (0) 2012.05.11
거룩한 염원(신봉승) 그리고 으아리꽃  (0) 2012.05.11
그리움을 노래한 시  (0) 2012.04.19
서강월  (0) 2012.04.18
불취불귀(허수경)  (0) 2012.04.18